'ㅇㅇㅇ님, 보내주신 서류 잘 받았습니다. 혹시 취업용 사진은 없으신가요?'


몇 날 며칠 구인 사이트를 뒤지다가, 그래도 일을 시작하려면 계약직이라도 대기업이 낫겠지 싶어서 이력서를 넣었다.

1년도 아닌 3개월 짜리 계약직, 심지어 공고도 글이 게시된 바로 그 다음 날 오후에 마감하고

정규직 전환은 절대 안되지만 운이 좋고 네가 일을 잘하면 계약을 연장 할 수 도 있다는 공고였다.


안정적인 정규직 자리를 알아봐야 할까 아니면 경력을 먼저 만들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망설이다가는 이도 저도 안될 것 같아서 부랴부랴 그들이 정해준 양식에 내용을 채우고 예전에 찍어둔 증명사진을 넣었다.


다음 날, 서류가 정상적으로 접수 되었다는 확인 문자를 뒤따라 내게만 보내진 문자. 


혹시 취업용 사진은 없으신가요?


그들은 무척이나 정중한 말투로 내게 구직자로서 기본이 안 되어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 학위도, 내 어학 점수도, 내 경력도 아니고 사진이 정말 이력서에서 문제가 된단 말인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력서에 사진을 넣는 것 조차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의문이었다. 


나도 안다 '취업 사진'이 뭔지는

다들 까만색 정장 자켓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올려 묶고 파란색 그라데이션 배경에 앞니를 8개 정도 보이며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제대로 찍으려면 20만원은 든다던 그 사진 말이다.  


여권에 들어가는 사진도 아니고 신분증에 들어가는 사진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다 똑같은 사진을 가지고 있는지 

그게 언제부터 취업용 사진이 된건지,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학사 학위랑 그 취업 사진은 자동으로 그리고 무료로 뿅하고 같이 생겨나는건지

저렇게 당연하게 요구하는 말을 들으니 이쯤 되면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 답신을 받은 이상 자연스럽게 '저 구직건은 서류에서 떨어지겠구나.' 라고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될까? 당연히 그 '취업용 사진'을 찍어야겠지 

나는 지금 절박하게 취업을 해야하고 쓸데 없는 자존심으로 그들의 눈 밖에 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 남들하는 것 처럼 사진을 찍어야겠지.


 포털 사이트에 'ㅇㅇ시 취업 사진'을 검색한다. 여러가지 후기를 보고 '취업용'사진을 찍는 스튜디오 중에서 가장 싼 사진 관을 고른다.

2만5천원. 그냥 증명사진도 여권사진도 만원이면 찍을텐데 이건 또 특별하게 '취업용' 사진이니까 일반 증명사진 보다 두 배는 더 비싸다.

그래도 따로 정장을 입고 갈 필요 없이 스튜디오에 의상이 준비 되어 있다고 하니까 의상 빌리는 값이다 생각하고

남들은 그래도 십 몇만원씩 쓴다는데, 그 정도면 엄청 싸게 찍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유튜브에 있는 증명 사진용 메이크업 듀토리얼을 보며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화장까지 하고 스튜디오로 향한다. 

막상 찍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내 뱃 속 깊숙한 곳에서는

이게 정말 내가 이 정도의 노력을 쏟을만큼 중요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저 취업 사진 찍으려고요"


사진사는 익숙한 듯이 사진관 구석에 준비 되어 있는 그다지 값 나가 보이지 않는 자켓과 셔츠들을 가르키며

"이건 55, 이건 66사이즈예요, 여성분들은 자켓 안에 하얀색 나시 입으시고요 나시는 여기에 있어요"


순간, 내가 지원하는 회사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취업용 사진이라는 것을 

다른 증명사진보다 추가적인 돈을 지불해가며 정장을 입고 찍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로 실크도 아닌 폴리에스테르인게 뻔하지만 실크인 척 광택을 내는 나시를 받쳐입고 

쇄골부터 가슴 언저리까지 드러내면서 또 그 위에는 정장 자켓을 입는다는 사실이 

마치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이 느껴지면서 내 머리 속에는 사이렌이 울렸다.


다시 한 번 뱃 속 깊은 곳에서 부터 반발심이 솓구쳐 올랐다.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장을 갖춰입은 구직자의 예의 있는 모습이라면, 나는 왜 굳이 그 속에 내 성별을 어필하는 나시를 입어야 하지?

입고 싶지 않았다.


옷을 갈아 입으라며 사진사가 자리를 비워준 사이 나는 재빨리 가장 작은 사이즈의 셔츠를 찾았다. 그리고 자켓을 입었다.

뭔가 부족해 보였다. 뭐가 부족하지? 라고 곱 씹으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행거 한 편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발견했다.

그래! 옷을 갖춰 입고 사진을 찍는게 그 들이 생각하는 예의라면, 정말 제대로 갖춰 입어줘야겠다.


여러가지 색 중에 그나마 어울리는 것 같은 넥타이까지 골라 매고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사진사는 별 말을 하진 않았다.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결과물은 퍽 마음에 들었다. 넥타이 매고 사진 찍을 생각을 했다는 내가 조금 대견스러웠다.


다음 날 함께 알바하는 동료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느낀 이 부조리함들을 그리고 작게나마 그 부조리한 일에 저항한 통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잘 나왔네요~ 그런데 그렇게 사진 찍으면 괜히 또 밉보이는 것 아녜요? 너무 자기 의견 강하고 드세 보일 것 같은데..'


가슴 한 가운데가 답답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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